연기 잘하는 배우인 이병헌, 류승룡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한효주가 나오는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첫 장면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광해군 8년, 역모의 소문이 흉흉하니 임금께서 은밀히 이르다.
"닮은 자를 구하라. 해가 저물면 편전에 머물게 할 것이다."
"숨겨야 할 일은 조보에 남기지 말라."
- 광해군 일기 2월 2일 -
그리고 나오는 마지막 한 줄
"이듬해 8월, 허균은 역성 혁명을 이유로 참수 당한다."
이 글에서 나오듯이 영화의 내용은 왕위를 위협받는 광해군이 자신과 닮은 인물을 찾아 대신 왕위에 앉히고 위험을 피한 후, 훗날을 도모한다는 내용이다.
배우들이 연기를 잘해 영화의 내용이 실제 사실인 것 같이 느껴지지만 약간의 사실을 근거로 한 허구의 시나리오였다.
그럼 실제 역사적인 사실은 어떤 것인지 궁금하여 찾아보았다.
▶ 광해군은 누구인가?
조선의 제 15대 왕으로 1608년부터 1623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이름은 이혼(李琿), 선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 공빈 김씨이다.
세자 책봉 문제로 인해 임해군과 갈등을 빚었으나 임진왜란이 발생하였을 때 국난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평양에서 세자에 책봉되었다. 임진왜란 기간 중 광해군은 평안도, 강원도, 황해도를 돌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왜군에 대항하기 위해 군사를 모집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는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하였으나 영창대군이 죽자 그 동안 많은 공을 세운 광해군이 1608년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 광해군의 업적
조선시대 왕 중에 광해군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왕도 없을 것이다. 한편에서는 쫓겨난 임금, 폭군으로 알려져 있고, 다른 쪽에서는 전쟁 후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나라를 위해 현실적인 정치를 펼친 왕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전쟁 후 광해군은 양전사업을 실시하여 토지 대장과 호적을 새로 만들어서 세금을 걷을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왕권의 강화를 위해 불에 탄 궁궐을 새로 수리하였으며 성곽과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 훈련을 통해 국방을 튼튼히 하려고 했다.
또한, <동의보감>을 편찬하게 하였는데, <동의보감>은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들을 이용한 책으로 일반 백성들도 이해하기 쉽게 만들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임진왜란으로 조선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일본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새로 권력을 잡고 다시 국교를 맺자고 간청해 왔다. 이에 광해군은 정기적으로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여 조선의 뛰어난 학문, 기술과 문화를 전해주었다.
또한 명나라의 힘이 약해지고 여진족들이 그 틈을 노려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이런 강력한 후금이 명나라에게 전쟁을 선포하게 되고 이에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도와준 것을 강조하며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게 된다.
신하들 대부분은 명나라의 요청대로 원군을 보내야한다는 의견이었지만 광해군의 생각은 달랐다.
당시 명나라가 쇠퇴해 가고 있는 상황이었고 오랑캐라고 깔보던 후금의 세력이 점점 커져가고 있는 상황에서 명나라를 도와주게 되어 버리면 또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광해군은 명나라로 원군을 파견하되, 후금의 미움을 사지 않도록 하는 중립외교를 선택하였다.
원군의 지휘관을 조용히 불러 "이 전쟁에서 명나라가 지게 된다면 조선은 후금의 노여움을 살 것이다. 싸움의 형세를 현명히 판단하여 중립을 지키도록 노력하여라"라고 말을 하였다.
예상대로 명나라가 패하였고 조선의 원군은 명의 요청에 의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을 밝히고 후금에 항복을 했다.
임진왜란이라는 큰 전쟁을 치른 후 또다시 전쟁에 휘말릴 수 도 있었지만 이러한 현명한 중립외교로 인해 전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 광해군의 안타까운(?) 최후
광해군의 최후는 중립외료를 반대하는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서인들이 '군주가 은혜를 몰라서는 나라가 설 수 없다.'라는 이유로 인조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는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게 되었다.
광해군이 폭군이라고도 불린 이유는 '인조반정'이 일어난 또다른 이유인 '폐모살제'라는 윤리에 어긋난 일을 한 것도 이유이다.
선조의 두번째 왕비인 인목대비를 일반 백성의 신분으로 낮추고 서궁에 유폐를 시킨 일과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인 일이었다.
과거 태종과 세조에 비하면 폭군이라는 말이 지나침이 있지만 서인과 북인 사이의 정치적인 갈등으로 인해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1623년 폐위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제주도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 후 1641년 사망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혼란스러운 나라 상황에서 왕권을 강화하여 나라의 혼란을 막고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중립외교 등 나라와 백성을 위해 여러 가지 위대한 일들을 하였지만 쓰레기 같은 정치 싸움의 희생양으로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최후를 맞게 되었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럼 이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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