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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으로 일어난 남한산성 항쟁의 기록

성질블로그 2019. 2. 11.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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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헌과 김윤식의 연기가 빛을 발휘한 영화 '남한산성'..............



병자호란을 배경으로한 영화이고 고립된 남한산성에서의 이조판서 '최명길'과 예조판서 '김상헌'의 대립된 주장 사이에서의 '인조'의 고뇌와 갈등을 그리고 있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실제 역사적 사실에 대해 알아보자.


▶ 병자호란



1636년 ~ 1637년 조선 인조 14년에 발행한 전쟁이다. 

청나라의 공물과 병선 등 과도한 요구와 압박으로 인해 조선의 분노가 폭발하게 된다.

이 때 조선에 청나라 사신들이 오게 되는데 조선의 동정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린 그들은 민가의 마필을 빼앗아 도주하던 중, 조선 조정에서 평안도관찰사에게 내린 유문을 빼앗아 청나라로 가져가게 된다.

이로 인해 청나라는 조선의 의중을 알게 되고 조선 침략을 결심하게 된다.

청나라는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입한다. 

이로 인해 인조는 한양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 남한산성

병자호란의 발생으로 인해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된다.

1636년 12월 15일 ~ 1637년 1월 30일까지의 짧은 기간동안의 청군의 공격을 막아내다 결국 실패한 전투이다.

원래는 청나라의 침공이 있을 경우에는 강화도로 옮겨가서 장기항전을 꾀하려 하였으나, 청군의 선봉대가 너무 빠른 시간에 한강 하구를 봉쇄하여 남한산성으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다.

인조 일행이 남한산성에 들어갔을 때는 군병력만 있었으면 2개월 정도는 버틸 수 있는 식량이 있었으나 왕실의 종친, 관료, 노비 등 인원들로 인해 식량의 부족이 우려되었다.

12월 15일 청군은 강화도로 통하는 한강 수로를 차단하였다. 그리고 12월 19일 남한산성의 동편과 남쪽에 분산 배치되어 포위망을 형성하였다.

이 후 두 차례의 집중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청군은 단기간에 항복을 받아내기는 어렵다고 판단하여 고립을 시키는 작전을 펼친다. 외부와의 연락을 완벽히 차단시키고 고립시켜 버렸다. 

이 때부터 남한산성 안에서는 끝까지 항쟁해야한다는 의견과 이제는 항복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대립하게 된다.

이 부분이 영화에서 이조판서 '최명길'과 예조판서 '김상헌'의 대립된 주장 사이에서의 '인조'의 고뇌와 갈등이 나타나는 장면이다.

결국 최후까지 항전하려던 방침을 포기하고 국왕이 직접 출성을 하여 항복을 결정하였다. 삼전도에 마련된 수항단에서 인조가 청태종에게 절을 하며 항복하는 조선 최대의 굴욕을 맞이하게 되었다.


남한산성 전튜는 방어전에 유리한 지형을 택하였으나 외부의 성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고립된 처지에 내부와 외부의 연계작전을 펼칠 수가 없었고 식량부족과 전의 상실로 말미암아 끝까지 성을 지키지 못한 실패한 전투로 기록되었다.



영화 마지막의 김상헌의 대사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 길은 백성의 길이요? 임금의 길이요?

(최명길이 같이 걸어야할 길이라고 함.)

나도 그리 생각했소...

하지만 틀렸소...

백성을 위한 새로운 삶의 길이란

낡은 것들이 모두 사라진 후에야 열리는 것이오.

그대도 나도.... 그리고 우리가 세운 임금까지도 말이오....

그것이 내가 이 성안에서 깨달은 길이오....

이 영화를 보면서 뜬금없이든 생각이지만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국민들을 생각은 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ㅎ

그럼 이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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