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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거:유관순 이야기에 나오는 유관순은 누구인가?

성질블로그 2019. 2. 15.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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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인 유관순에 대한 이야기가 [항거:유관순 이야기]라는 영화로 탄생되었다.

유관순 역할을 맡은 유관순의 열연이 빛나는 작품이다.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 후 3평도 안되는 서대문 감옥 8호실 속이다.

영혼만은 누구보다 자유로웠던 유관순과 8호실 여성들의 1년동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위대한 독립운동가인 유관순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 알아보자.



▶ 유관순은 누구인가?

1902년 12월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 (현재 천안시)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인해 개신교 집안이었으며, 이러한 집안의 영향으로 유관순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유관순은 계몽운동가였던 홍호학교 운영에 가담하여 인재 배출을 위해 노력하며 자녀 교육에도 적극적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서울 이화학당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1918년 3월 18일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고등과로 진학하였다. 

이화학당은 을사늑약 이후, 오후 3시만 되면 모든 수업을 중단하고, 조국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회와 시국토론회 및 외부인사 초청 강연회를 개최했는데 유관순도 회원으로써 활발히 활동하였다.

1919년 고종이 서거하여 학생들은 상복을 입고 학교는 휴교에 들어갔으며 정기모임을 통해 적극적으로 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로 인해 파고다공원에서 벌어진 3.1운동에 직접 참여하였다.



▶ 만세운동

학생들의 시위가 극심해지자 일제는 전국에 휴교령을 내렸다. 학교로 갈 수 없었던 유관순은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유관순은 아버지와 마을 어른들에게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했고, 몰래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며 병천 시장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게 된다.

유관순과 사촌언니는 만반의 준비를 한 뒤, 1919년 4월 1일 병천시장에서 수천명이 참여한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이 독립만세운동이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이라고 불린다. 이 만세운동에서 유관순의 부모 등 19명이 순국하였으며, 많은 사람이 부상을 당하였다.

주도자로 체포되어 공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3년형을 언도받아 일제의 잔인함의 극치를 보여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게 된다.

그러나 유관순은 1920년 3월 1일에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여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3천여명의 수감자들의 만세 소리가 형무소 밖으로 퍼져나갔고, 이 만세소리를 듣고 형무소 주위로 몰려든 인파들로 전차 통행이 마비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유관순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고문을 받게 되었다.

수감되어 있던 유관순은 계속되는 끔찍한 고문과 영양실조로 인해 1920년 9월 28일 꽃다운 18세의 나이로 순국하게 되었다.

이후 이화학당은 형무소에 유관순의 시신을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거부하였다.

하지만 이화학당의 교장이었던 월터는 이 일을 미국 신문에 알려 세계 여러나라에 호소하겠다고 강력히 항의하였고, 결국 일제는 해외에 알리지 않는다는 조건과 장례를 조용히 치러야 한다는 조건을 붙이고 시신을 인도하였다.

이렇게 어렵게 학교로 돌아오게 된 유관순의 시신을 보고 학생들은 대성통곡을 하며 맞이하였다.



▶ 치졸하고 더러운 일제의 만행

일제는 유관순 열사의 의지를 꺾기 위해 머리에 약품을 발라 머리 가죽을 통째로 벗겨내거나 펜치로 손톱과 발톱을 뽑고 입에 호스를 연결하여 뜨거운 물이나 오물을 투입했다.

그리고 면도칼로 귀와 코를 깎고 달군 쇠로 성기를 지지는 등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성(性)고문도 행해졌다.

물이 든 독 안에 알몸으로 가둔 후 미꾸라지를 풀어놓았고 다른 독립열사들 앞에서 가슴을 도려내는 등 차마 말로는 할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

이러한 고문은 유관순 열사가 숨지기 직전까지 계속되었고 지독한 고문에 의한 방광 파열로 순국하시게 되었다.

이후 일제는 이러한 만행을 숨기기 위해 모든 자료를 폐기하였다. 



▶ 위대한 독립운동가 유관순

끔직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유관순 열사는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으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다"라고 말하며 투쟁 의지를 보여줬다.

그리고 눈을 감기 직전에도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라고 절규에 찬 목소리로 조국의 독립을 바랬다.

유관순 열사의 묘는 이태원 공동묘지에 있었으나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개발하면서,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었으나 현재 실전되어버린 상태이다.

유관순 열사가 순국하시고 20년이 지난 1951년 '순국열사'로 인정되었고,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요즘 일본은 자신들이 과거에 저지른 일들이 잘못인지 아닌지도 구분 못하는 정신병에 걸려있는거 같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짓들을 저질러 놓고 사죄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큰소리를 치고 있다.)

과거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통을 받은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날이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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