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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차왕 엄복동'에 나오는 엄복동은 누구인가?

성질블로그 2019. 2. 7.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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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시절에 1910년부터 자전거 선수로 이름을 떨치며 20여년 동안 전국의 자전거 대회를 석권하였다.

일본 선수들에 맞서 계속 승리를 함으로써 나라잃은 설움을 달래주었다.

이로인해 자전거 경기는 최고의 인기를 얻게 되었고 해마다 많은 자전거 대회가 열렸다.



▶ 자전거왕 엄복동은 누구???



1892년 서울에서 태어나 1951년에 생을 마감하셨다.

아버지 엄선랑과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고 본적은 서울 중구 오장동으로 되어 있다.

활동할 당시 그의 경기는 자세히 신문에 소개되었지만 가정환경과 성장과정 등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당시 자전거 선수들은 자전거 점포의 소유주이거나 직원이었던 것처럼 엄복동도 역시 평택의 '일미상회'라는 자전거 점포의 직원으로 일하며, 자전거를 배웠다.


엄청난 사실은 서울에서 평택까지 출퇴근을 했다는 것이다. 출퇴근 거리는 약 65km!!!!!!!!!

이 엄청난 거리를 왔다갔다 했는 것을 보니 자전거 대회의 우승을 휩쓸고 다닐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 본격적인 활동

엄복동이 처음 우승한 대회는 1913년 3월에 개최된 '육군기념제 자전거경주연합대회'이고, 본격적인 선수 활동과 유명해진 대회는 1913년 4월의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사가 용산 연병장에서 개최한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에서 중고 자전거를 들고 나와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이 경기는 당시 경이로운 규모인 10만명이 운집했다고 한다.


이 경기에 대해 '매일신보'에서는 이렇게 묘사했다.

"10만 관객이 박수 응원을 하는 가운데 엄복동과 황수복 선수는 다른 선수보다 앞서 나가다가 다른 선수가 쫓아옴을 보고 더욱 더 용맹하게 넓은 경주장을 20분만에 돌아 엄복동은 1등, 황수복은 3등을 점령하여 10만 동포의 박수갈채하는 가운데에 감사한 눈물로 동포의 다대한 열성을 사례하며 엄복동은 인천 공영사에서 기부한 우승기와 용천상점에서 기부한 라지 자전거를 받았고......."


이 대회 이후, 

1918년, 1920년, 1922년, 1923년, 1925년, 1928년, 1929년, 1932년 등 엄청난 우승기록을 남겼다.

특히, 1932년 마지막 우승인 '전조선 남녀 자전거 대회 1만미터 경기'에서 우승할 당시 나이가 무려 41세였다.

당시 보통 30을 넘기게 되면 중년으로 취급되던 시절이어서 엄청난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 어려운 우승의 길............

1913년 이후, 연전연승을 거두며 우승하게 된다. 엄복동이 출전하는 대회마다 대개 조선인과 일본인의 대결이 되곤 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로 1920년 경복궁에서 열린 대운동회에서의 '우승기 사건'이다.

이른 아침부터 광화문에서 경복궁 경회루 앞까지 사람들로 물결을 쳤다. 


이 경기에는 조선, 중국, 일본 등에서 70여 명의 선수들이 참가했다. 예선전에서 1등을 한 엄복동 선수와 일본인 선수가 결승에서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 

결승전은 운동장을 40바퀴를 돌아야 했고, 모두 8명의 조선인과 일본인 선수들이 참가했다.

엄복동 선수는 일본인 선수와 함께 선두에서 달리고 있었고, 30바퀴가 넘었을 때 엄복동 선수는 이미 2등 선수와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중지!!!!" 라는 심판의 소리와 함께 경기가 중단되었다. 조선인의 우승을 막기 위해 일본인 심판이 '해가 졌다'는 이유로 경기를 중단시켜 버렸다. 이에 엄복동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우승기가 있는 곳으로 가서 "이것은 내가 1등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한 수법이다. 이까짓 우승기는 뒀다가 뭐하려는 것이냐?" 라고 소리치며 우승기를 꺾어 내동댕이쳤다.

일본인 심판과 주위에 있던 일본인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엄복동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조선인들이 "엄복동이 맞아 죽는다!!!!!!!!" 라고 소리치며 엄복동을 구하기 위해 운동장으로 뛰어 들었다.

분노한 조선인들로 경기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지만 출동한 경찰들이 군중을 해산시키고 대회를 중지시키며 일단락되었다.


▶ 일본인의 요구를 거절하다

일본인들은 일왕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기 위해 조선신궁대회라는 체육대회를 자주 열었다.

당연히 엄복동에게도 이 대회에 출전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일본인들이 주최하는 대회에는 출전하지 않았다.


1972년 출간된 '한국인물대계' 엄복동 편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인기가 상승되는 존재로 부각되자 일본인 각 자전거점에서는 그를 회유하여 끌어오려고 했지만 그는 단칼에 거절함으로써 자기에게 보내진 민족의 기대를 헛되이 하지 않았음은 물론 일본에서 개최되는 자전거 경기에는 참가를 거부했다."


특히 엄복동이 참가하는 경기가 있는 날이면 조선인들이 엄복동을 응원하며 일제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자 엄복동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경기장에서 폭동을 주도하는 주동자라고 하며 그를 체포한다. 하지만 그가 체포되자 동포 대표들이 엄복동을 석방할 것을 요구했고 곧 풀려나게 되었다.


그가 35세가 되던 1926년 은퇴를 했지만, 그의 인기가 여전했기에 대회가 개최되면 그를 항상 초대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41세까지 선수 생활을 하였고 1만m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영웅의 쓸쓸한 최후.......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엄복동은 경기도 동두천 근방에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의 영웅이며 유명한 선수였지만 가난한 삶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했다고 말했다.

엄복동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한국전쟁 중 1/4 후퇴 때 동두천 부근의 야산에서 북한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말이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 민족의 애환을 같이 했던 자전거 영웅의 최후는 이같이 쓸쓸했다.

그의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는 아들 엄만길 뿐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그를 기리기 위해 1977년 '엄복동배 전국 사이클 경기대회'가 개최되었고, 1987년 그가 잠시 거주했던 의정부시에 엄복동 동상이 세워졌다. 



그리고 엄복동이 탔던 영국의 'Rudge Whitworth'사가 제작한 경기용 사이클은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전해진다.

조선에서는 '라지 자전거'로 소개되었었다.


의정부 사이클 경기장 앞에 있는 엄복동 동상을 보면 그의 경기에서 조선인으로써의 자부심을 느끼는 군중들의 뜨거운 함성소리가 상상된다.


그럼 이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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