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관련 정보

[봉오동 전투] 홍범도 장군이 이끈 '봉오동 전투'란?

성질블로그 2019. 10. 3. 15:24
반응형

일본과의 정치적인 갈등이 심화되면서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지금, 대한민국 독립운동 중 벌어진 전쟁 중에서 크게 승리를 한 '봉오동 전투'가 영화로 만들어졌다.

'봉오동 전투'는 유해진, 류준열 등의 연기파 배우들이 출여하여 영화를 이끌었다.

일본군에게 크게 승리를 하여 그 당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엄청난 자신감을 심어준 '봉오동 전투'와 이 전투를 이끈 홍범도에 대해 알아보자.

 

봉오동 전투

홍범도가 이끈 대한독립군, 안무가 이끈 국민회군, 최진동이 이끈 군무도독부가 연합하여 결성된 대한북로독군부와 한경세가 이끈 대한심민단의 독립군 연합 부대가 야스카와 지로 소좌가 이끈 일본군 19사단 월강추격대대를 크게 쳐부수었다.

19193.1운동 이후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의 무장 항쟁이 활발해지자 일본은 독자적인 독립군 토벌작전을 추진하였다.

활발히 국내 진공 작전을 펼치던 독립군들은 봉오동에 집결하여 좀 더 강력하게 국내 진공 작전을 펼칠 준비를 하였다.

19206대한신민단의 독립군 부대가 일본군 순찰소대를 급습하여 타격을 입혔다.

다음날 일본군 1개 소대 병력이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해오자, 대한북로독군부의 독립군은 삼둔자에서 일본군 추격대를 공격하여 피해를 입혔다.

 

 

이를 핑계로 함경북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19사단 중에서 월강추격대대를 편성하여 중국 영토로 침입하고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 공격에 나섰다.

독립군 연합부대는 봉오동의 산지에 매복하고 있다가 일본군을 포위하고 궤멸시켰다.

엄청난 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퇴각하였다.

봉오동 전투는 중국 영토인 만주지역에서 대한민국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서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다.

봉오동 전투의 승리로 독립군의 사기는 크게 높아졌고, 독립군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 홍범도는 누구인가?

1868년 평안북도에서 태어난 홍범도는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수렵과 광산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의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고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려고 하자, 뜻이 같은 사람들과 산포대를 조직한 뒤 총포를 회수하러 온 일본군을 갑산, 삼수등지에서 유격전을 벌여 격파하였다.

9시간 정도의 전투 끝에 일본군을 전멸시키고 한동안 갑산일대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1910년 일본에 의해 대한민국이 강제 점령 당하자,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만주를 기반으로 국내를 왔다갔다하며 일본군을 급습하며 괴롭혔고 봉오동 전투에서 엄청난 성과를 이루었다.

그 후, 또 다른 큰 승리를 거둔 전투인 청산리 전투에도 제1연대장으로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러시아령 흑하자유시로 이동하여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던 중,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를 하게 되었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극장 야간수위, 정미소 노동자로 일을 하다가 1943년 숨을 거두었다.

1962년 카자흐스탄의 기자들과 한인들이 중심이 되어 크질오르다 중앙공동묘역으로 이장을 하고, 흉상과 3개의 기념비를 세웠다.

그가 살던 집 근처의 거리는 홍범도 거리로 지정되었다.

그 후,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훈을 기리며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런 영화가 만들어지면 그 당시만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지만
, 하루 빨리 친일파 후손들의 재산이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럼 이만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