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박열'에 나오는 실제 인물 '박열'에 대해 알아보자.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퍼진 괴소문으로 인해 6천여명의 무고한 조선인들이 학살 당하게 되었다.
이 학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사람들의 관심을 돌릴 화젯거리가 필요했던 일본정부는 항일운동을 하던 조선인 '박열'을 사건의 배후로 지목하게된다.
일본의 계략을 눈치챈 '박열'은 연인인 '후미코'와 함께 일본 황태자 폭탄 암살 계획을 자백하게 된다.
말 안 듣는 조선인 중 가장 말 안 듣는 조선인!!!으로 통하는 조선의 아나키스트 '박열'에 대해 알아보자.
▶ '박열'은 누구인가?
1902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박열'.... 어린 시절을 보낸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는 일찍부터 일제에 의해 광산촌으로 형성이 되었던 곳으로 알려졌다. 조선총독부의 후원아래 일본놈들이 마구잡이로 개발한 광산촌에는 조선인에 대한 노동착취, 저임금과 인권유린 등의 폐해가 일어났던 만큼, 반일정서가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박열'은 이 지방 최초로 설립된 4년제 보통학교에 통학하면서, 민족의식 형성에 큰 계기를 갖게 되었다. 1916년 졸업식을 앞두고 조선인 선생님이 학생들을 모아 놓고, 자신이 그 동안 일본의 압력을 못 이겨 거짓교육을 시킨 것에 대해 눈물로 사과하며 조선 역사의 존엄성을 일깨워 주었다.
'일본교사는 형사'라는 선생님의 말에 큰 충격과 감동을 받은 '박열'은 공부를 계속해서 민족을 위해 큰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하였으나 일본인이 세운 학교에 다니는 치욕을 견딜 수 없다며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 부인 가네코 후미코와의 만남
고향 문경을 돌아온 후 친구들과 함께 태극기와 격문을 살포하는 등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친구들에게서 일제의 가혹한 고문과 탄압의 만행을 전해 듣고 국내에서는 더이상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일본으로 건너가기로 마음 먹는다. 1919년 도쿄로 가는 배에 몸을 싣게 되었다. 도쿄에 도착한 '박열'은 신문배달, 우편배달, 인력거꾼 등의 노동에 종사하였다. 이러한 고된 생활 속에서도 틈틈이 단기어학 전문학원에 다니며 학업에 전념을 하였다.
그리고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하기 위해 도쿄에 거주하는 고학생들을 모아 의혈단을 조직하였다. 이 조직은 친일 행위자들에게 협박장을 보내고 응징을 하겠단느 위협을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를 만나게 된다.
요코하마 태생의 '가네코 후미코'는 불우한 가정환경과 성적학대로 제국주의 일본의 모순을 온몸으로 받아오면서 '천황제'와 '군국주의'에 엄청난 반감을 가지고 있는 자유여성이었다.
7년 정도의 시간 동안 조선에서 갖은 고생을 하였던 그녀는 도쿄시내에서 작은 오뎅집에서 일하면서 조선 유학생들과 교류를 하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조선잡지에 실린 선생의 자작시를 읽고 감동을 받았고 동시에 흠모하는 마음도 생기게 되었다.
두 사람은 만남을 통해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함께 항일운동을 펼치며 자연스럽게 동거생활을 하게 되었다.
▶ 항일운동
1921년 일본에 있던 유학생들과 첫 사상단체인 흑도회를 결성하였다.
다양한 항일투사들로 결성된 흑도회는 세계노동절 행사를 비롯해 일본 사상단체의 반정부 시위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2년 니카다현에서 조선 노동자들이 가혹한 노동착취와 학대로 다수가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박열'과 '김약수'를 조사단으로 파견하였다. 이 사건의 조사결과를 도쿄 YMCA에서 보고를 하게 되었는데 일본과 조선의 지식인들 등 약 1천여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이러한 반인도적 행위가 민족차별과 식민체제에서 비롯 되었다고 보고, 근본적인 파괴의 필요성을 역설하다가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니카타현 조선 노동자학살사건을 계기로 흑도회 내부에서 '박열'과 '김약수'와의 의견 대립으로 인한 균열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의견 대립으로 인해 흑도회의 해체를 불러왔고 '박열'은 직접적인 행동으로 일제에 맞서자는 회원들과 함께 흑우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그리고 흑위회와 별도로 '불령사'를 조직하였다. 총 21명으로 구성된 불령사는 국내의 파업투쟁을 후원하고, 사회주의를 매도한 조선기자를 폭행하는 등 반일 직접활동을 주도하였다.
'박열'은 외국에서 폭탄을 반입할 방도를 논의하였으나 3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1923년 가을 일본 황태자 결혼식 소식을 접하고 거사를 계획하게 된다. 다시금 폭탄구입을 시도하려하였으나, 구입비용으로 인해 잠시 보류하였다.
그러던 중 도쿄 대지진이 발생하면서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일본 내각과 군부는 민란의 움직임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게 된다. 이러한 아비규환의 원인을 조선인들에게 뒤집어 씌우기 위해 유언비어를 살포하여 일본의 일부 노동조합 간부들과 약6천여명의 조선인들이 무참히 희생당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등 불령사 회원들 역시 구속되게 된다.
조사 도중 불령사의 폭탄구입계획을 당당히 밝혀 검찰들이 알게 되었고, 이러한 일을 조작하여 '불령사'를 폭동과 일왕 암살 조직사건 등 '대역사건'으로 비화하기 시작하였고 대지진을 틈탄 조선인 비밀결사의 폭동계획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게 된다.
지루한 법정 공방이 계속되고 일제는 두 사람의 항일의지를 꺾기 위해 여러 가지 방해공작을 펼쳤으나, 1926년 급작스러운 '가네코 후미코'의 자살소식이 전해졌다. 죽음의 원인이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는 서둘러 그녀의 사체를 가매장하였다.
▶ 해방 이후의 행적
21세의 나이에 투옥된 후 1945년 44세의 나이로 석방이 되었다.
23년의 투옥생활을 끝낸 후, 1946년 김구의 부탁을 받아 3열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들의 유해송환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반일, 반공산주의적 노선을 택한 '박열'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축전에 초대되어 귀국하였고, 이듬해 영구귀국을 결심하고 서울에 머물게 된다. 하지만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을 하게 되었고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박열'을 북으로 데리고 가게 되었다. 북으로 끌려가게 된 이후의 '박열'에 대한 소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남북정권이 평화 통일을 이룩할 수 있게 노력을 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던 중 1974년 평양에서 72세의 나이에 숨을 거두게 된다.
그 해 2월 남한에서 죽음을 애도하는 추도회가 열렸고, 이후 정부는 '박열'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자신의 신념과 사상을 굽히지 않고 일본의 재판장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던 독립운동가 '박열'.......
광복이 되고 나서 자신들의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친일 행위를 했던 놈들이 제대로 정리가 안되어 진심으로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이 더 피해를 입는 이상한 상황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아 답답하다.
이러한 독립운동가 분들이 잊혀지지 않도록 우리들이 꼭꼭 기억을 해야할 것이다.
그럼 이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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